일본이 백제를 이은 국가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역사책을 보면 백제는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고, 이후 신라와 당의 지배 아래 사라진 것으로 나온다. 반면 일본, 즉 야마토 정권은 열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국가로 기록된다. 하지만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깊이 파고들면, 일본이 백제의 유산을 계승하며 오늘날의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백제의 문화적 영향뿐 아니라 백제 유민의 이주와 정체성 전파를 통해 일본이 백제의 후계자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4세기부터 7세기까지 매우 가까웠다. 백제는 일본에 불교, 건축 기술, 한자 등을 전하며 야마토 정권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6세기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전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때 백제는 단순한 이웃 나라가 아니라 일본의 문화적 스승 역할을 했다. 백제에서 건너간 기술과 사상은 일본 사회의 기초를 닦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많은 백제 귀족과 백성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유민이 일본에 정착해 귀족 계층(예: 기키 씨족)으로 활동하거나 기술자로 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은 백제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뿌리내리게 했다. 예를 들어, 백제식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호류지 사찰은 오늘날까지 일본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이주는 단순한 피난이 아니라 백제의 문화와 정체성이 일본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의 기록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단서를 준다. 당나라 금석문에는 "去顯慶五年(660) 官軍平本藩日 于時 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660년에 당나라 군대가 본번(백제)을 평정했을 때, 일본의 잔당이 부상(일본 열도)에 의거해 징벌을 피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660년 당시 왜(야마토 정권)는 백제를 지원하지 않았다. 백제를 지원한 왜군은 663년 백강 전투에서야 등장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日本餘噍"은 왜군이 아니라 백제의 패잔 세력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백제가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그 잔당이 열도로 도망갔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한 《구당서》에는 '일본은 과거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일본이 열도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왜국을 통합한 과정을 나타낸다.
"일본(日本)"은 "해가 떠오르는 나라"라는 뜻을 지닌다. 이는 백제의 뿌리인 부여와 고구려가 태양 숭배 문화를 공유했다는 점과 연결된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 "졸본"은 한자로 "卒本"이라 쓰지만, 당시 발음은 "흘본"으로 추정된다. 한국어에서 날짜를 세는 단어들, 예를 들어 "이틀", "사흘", "닷새", "이레" 등에서 "틀", "흘", "새", "레"는 모두 "해(태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루를 나타내는 단위로 숫자와 결합되어 사용된다. 이는 "흘"이 "해"와 연결된다는 언어적 증거로, "졸본"이 "태양의 근본"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와 유사하게 "일본"도 "해가 떠오르는 나라"라는 뜻을 지니므로, 백제 유민이 이러한 태양 상징을 일본 열도에 전하며 "일본"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일본이라는 국호가 공식화된 시점도 백제 유민의 이주와 맞물린다. 원래 "왜(倭)"는 중국이 열도를 부르던 외부 명칭이었다. 하지만 670년대 이후 야마토 정권은 "일본"으로 국호를 바꿨다. 이 시기는 백제 멸망(660년)과 백강 전투(663년) 패배 후 백제 유민이 대거 이주한 시기와 겹친다. 백제 유민은 기존 왜 세력을 통합하고, 백제의 선진 문화를 바탕으로 "일본"이라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강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이 백제를 이은 국가라는 이유는 일본이 백제의 정치적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일본은 백제의 정통성을 잇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663년 백강 전투에서 패배한 뒤, 나당 연합군이 일본 열도까지 쳐들어올까 두려웠을 것이다. 적이 피난 온 백제 유민을 공격하러 오면 일본은 그들을 지킬 힘도, 한반도로 다시 진출할 여력도 없었다. 결국 백제의 정치적 후계자가 되고 싶었어도 현실적 한계 때문에 불가능했고, 대신 백제의 문화적·인적 유산을 흡수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백제 멸망 후 열도로 간 유민들은 잃어버린 고국의 이름을 되살리려 했고, 그 결과 "일본"이라는 이름 아래 백제의 흔적이 남았다. 역사적 사실에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면, 일본은 백제의 피와 정신이 흐르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백제와 일본의 깊은 연관성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일본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 天智天皇 2년(663))